이번 글에서는 읍성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읍성은 한국의 지방 행정 단위인 읍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성곽으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행정적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축조된 읍성은 지역 주민 보호와 산업 증진을 목표로 하였다.
통일신라 읍성
읍성이란 지방의 부, 군, 현 등의 행정관서가 마련된 고을에 유사시에 외적을 대비함과 동시에 행정적인 편의를 위해 마련한 성곽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읍이란 주민이 모여 사는 고을을 의미한다. 이는 행정위계에 따라 읍성을 부성, 군성, 현성 등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구분하지 않고 읍성이라 부른다. 읍성이란 지방의 고을을 둘러싼 곳에 성곽을 마련하여 도성과는 구별되는 지방도시의 성곽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읍성이 처음 마련된 시기는 청동기 시대부터 축조되었다고 하나, 우리는 언제부터 읍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었던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낙랑의 치소에는 토성이 남아 있고, 대방군의 치소였던 토성도 사리원 동쪽에 남아 있다. 또 이 시기의 현에도 작은 읍성이 있었는데, 이 성들은 주로 넓은 구릉지나 평야지대에 토루로 축조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신문왕 5년때 9주 5소경에 읍성을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의 읍성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평야에 방형으로 축조한 다음 일정한 구획을 나누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읍성들의 일부는 후대까지 수, 개축을 통해 유지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러한 읍성들은 주변에 배치된 산성들로 보아 유사시에는 인근의 산성에 입보할 수 있도록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전기
고려시대의 읍성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고려 전기에는 동해 연안으로 동여진에 대비한 연해읍성의 축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문종 때 최충이 왕에게 “지난해에 서북지방의 주와 진에서는 흉작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빈곤하여 남자는 요역으로 피곤하고, 여자는 식량을 구하기에 피곤하니 앞으로 성지를 수축하는 이외의 공사는 일체 금지하도록 건의하자 이에 따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후기의 연안읍성은 주로 남쪽의 왜구를 막기 위한 대비책으로 고려시대의 왜의 침입은 고종 10년 금주에 왜인이 침입한 것을 시작으로 연해 주민들이 피해를 입기 시작하였다. 또 충정왕 2년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의 침입은 공양왕 4년까지 약 40여년간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러한 왜구 침입에 대비한 읍성의 축조는 처음으로 고종 38년에 금주에 축성하게 되었고, 왜구의 침해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방어 상의 이점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였다.
고려 후기
고려 말까지는 규모가 작은 토축으로 된 읍성이 상당수 존재하였다. 현재 읍성이라고 불리는 형식의 성이 마련된 시기는 고려시대의 후기라고 할 수 있다. 왜구에 대비한 읍성은 고종 때 금주성을 마련하여 왜구에 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축조된 읍성은 군사적인 성격으로 연해 지역부터 우선적으로 축조되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이 당시에 마련된 읍성들은 주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축성된 지형 여건도 평지나 평산 지역에 마련되고 있다. 특히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였던 기간은 충정왕 2년에서 공양왕 4년에 이르기까지의 40여년간이 가장 심하였다. 고려 후기에 축조된 29개의 읍성 중 타도에 설치된 6개 제외한 23개소는 경상도에 축성되었다. 이 당시의 읍성은 청야입보하여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과 해변옥야의 산업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조선시대 이전에 축조한 것으로 판단되는 고읍성들은 대부분 구릉지에 마련한 퇴뫼식이나 포곡식의 읍성으로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읍성 형식과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