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남한산성 내의 성내시설물 중 행궁과 관아에 대해 설명하였고 이번에는 그 외의 성내시설인 창고, 사찰, 사당, 취수시설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군수물자를 보관하는 영고를 비롯한 다양한 창고시설, 승군들을 위해 건립된 장경사 등 9개의 사찰, 온조왕과 이서를 모신 숭열전 등의 사당들, 그리고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지를 포함한 취수시설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겠다.
창고
성내(城內)에는 유사시와 평상시 성곽관리에 필요한 다양한 창고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창고시설은 군기, 군수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들이다. 그 외에 다양한 용도의 각종 창고시설이 마련되었다. 그중 중요한 창고시설로는 수어청의 영저, 호방의 보장고, 그 외 급료로 주기 위한 보향고, 보관고 등이 있고, 성곽수리에 필요한 성기고, 군기고 등 다양하였다. 현재 남한산 초등학교 부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영고를 들 수 있는데, 영고는 201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창고 건물이었다. 이 영고의 건물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으나, 일제강점기 때의 기록사진이 남아있다. 영고는 천자문의 천, 지, 현, 황 순으로 명칭을 붙인 24개소의 창고로 구분하였다. 이 창고에는 포목, 간장 등을 포함한 각종 물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였다. 그 외의 창고로 행궁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창고(수창)는 호조, 진휼청, 상평청 등 세 관아의 여러 곡식을 쌓아두는 창고였다.
침괘정
침괘정은 산성 내 마을 동쪽 언덕 위에 있는 건물로 축조의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침괘정을 발견한 이는 인조2년(1624년)에 남한산성을 축조하러 온 이서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군기제작소 또는 보관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돼 있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7년(1751년)에 유수 이기진이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사찰
남한산성에는 월내 망월사와 옥정사 2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의 축성 시에 7개의 사찰을 추가로 건립하여 전체 9개소나 되는 사찰이 있게 되었다. 이는 팔도에서 소집된 승군의 숙식과 축성을 위해 새로 마련된 사찰들이다. 이 당시에 새로 세워진 사찰은 장경사, 국청사, 개원사, 한흥사, 천주사, 동림사, 남단사 등이었다. 성이 완공된 후에도 전국에서 상경한 수백 명의 승군과 승번제도를 유지하다가 고종 31년(1894)에 폐지되었다.
장경사
장경사는 인조 2년(1624년)에 건립했다. 남한산성의 축성이 시작된 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해 사역을 돕게 했는데, 이들의 위해 창건된 사찰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현재 대웅전을 비롯해 진남루,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는데, 남한산성의 축성 후에도 승군을 주둔시켜 훈련시켰을 뿐 아니라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전국에서 270여 명의 승려를 교체하변서 상주하였다고 한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돼 있다.
망월사
원래의 망월사는 사라졌고 법당의 축대와 법당 계단으로 활용된 장대석과 일부 주춧돌만이 원래의 망월사의 것이다. 대웅전과 금당, 요사채, 적멸보궁 탑과 병풍석 등은 199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로 지정돼 있다.
개원사
개원사는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수비하기 위해 조선 인조2년(1624년)에 전국에서 올라온 승도들을 총지휘하는 본영 사찰로 창건되었다. 이때부터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호국 사찰로 있었다. 1907년에 있었던 화재로 인조 15년(1637년) 때부터 보관돼 오던 대장경과 법당, 누각 등이 소실되었고, 지금은 군기고지, 누각지, 종각지 등의 터가 당시 개원사의 규모를 짐작케 할 뿐이다. 현재는 산성수호 승병들의 유분과 석장, 옹기, 함지 등이 남아 있는 개원사는 경기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돼 있다.
사당
숭열전
숭열전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인조 때 산성축조 시 축성책임자였던 이서의 영혼을 함께 모신 사당이다. 제사는 매년 음력 9월 5일에 지낸다. 이 사당은 인조 16년(1638)에 처음 지어졌으며, 정조 19년에 숭열이라는 현판이 사액되었다. 숭열전은 성곽의 서북 측에 위치한 곳으로 행궁과 북장대터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절사
현절사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심양에서 충절을 지키다가 비운을 맞은 삼학사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후에 좌의정 김상헌, 이조팜판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오학사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숙종 14년 (1688)에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숙종 19년 (1693)에 사액되었다.
청량당
청량당은 이 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을 맡은 이회가 축성 시 모함으로 인해 교수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무고함이 밝혀진 후에 그의 부인 송 씨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사당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청량당의 위치는 수어장대 이구에 있다.
취수시설
성내에 필수적으로 마련되어야 하는 시설중의 하나가 취수시설이다. 취수시설은 다양한 형식이 있다. 일반적인 소규모의 성곽에는 샘이나 우물 등이 필요하나 규모가 큰 규모는 군마가 필요로 하는 취수시설로 저수지 등을 필요로 한다. 남한산성의 경우 우물 80개소를 비롯하여 연지가 45개소나 마련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수당
현종13년(1672년)에 부윤 이세화가 세운 것으로 알려진 지수당은 당시 고관들이 낚시를 즐기던 장소로, 건립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2개의 연못만이 남아 있다. 정자에는 ‘지수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마루는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주위에 30cm 높이의 난간이 있고, 남, 북, 동쪽에 각각 난간 중앙을 터서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돼 있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의 성내 시설 중 창고, 사찰, 사당, 취수시설에 대해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