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진성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중요한 군사지역에 설치했던 지방행정구역인 진은 신라시대부터 나타났고, 진에 쌓은 진성은 고려 초기부터 마련되었다. 진관체제를 통해 전국적인 방위체계가 마련되었으며, 특히 해안지대의 수군 진은 왜구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진도, 태안, 해남 등지의 진성들은 당시 군사적 방어체계의 중요한 증거이다.
진성
진이란 군사상 중요한 지역에 설치한 지방행정구역의 하나로 신라시대부터 진이 설치되었다. 신라시대에는 동해안 일대의 말갈을 막기 위한 북진, 서해안 방비를 위한 패강진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외 해상 방면의 방어를 위한 진으로서 청해진, 당성진, 혈구진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진의 설치는 계속되었는데, 태조 12년에 안정진에 성을 쌓고 또 영청, 안수, 흥덕 등의 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고려시대 초기부터 진성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의 29진 가운데 동계에 16진, 북계에 12진, 서해도에 1진이 있다. 고려 때의 진은 북쪽의 국경지대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던 점이 특징이다. 고려 태조 때에는 진장을 군사적 수장의 성격만을 나타내는 진두라 칭했는데, 이것은 이때의 진이 단지 군사적 거점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문종 때에는 진에 장, 부장 각 1명을 배치하여 진에 대한 사무를 통괄하게 하였다. 조선의 건국초기 지방군제는 기본적으로 고려제도를 답습하였다. 각도에 군사를 담당했던 도절제사는 대개 서울에 머물러 있었기에, 실제 지방의 군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도제절사의 예하 솔행군관이라 불리는 기간요원이었다. 그러다가 태조 6년에 각도에 2~4개의 진이 설치되어 첨절제사가 부근 군현의 병마를 통할하게 되었다.
진관체제
조선 태종실록에 전국에 모두 15개소의 진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초기 군사편제가 더욱 조직화된 것이 조선시대의 상징적인 지방군사제도인 진관체제였다. 세조 3년 10월 각 지역의 전략적 거점을 거진으로 해서, 주변의 제진을 그 예하에 소속시킨 진관편제는 거진을 중심으로 제진을 이에 부속시킴으로 제진의 독자성을 부여하고 일원적 군사체제를 더욱 분명히 한 조치였다. 진관체제에서 각도 병마절도사를 두고, 도내의 육군에 대한 지휘권을 갖게 하였는데, 그의 주재지가 주진이었따. 그 아래에는 목사(종 2품)가 겸하는 경우가 많은 첨절제사가 거진을 단위로 하는 진관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아래 제진은 군수(종 4품) 이하 동첨절제사 이하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함께 수군도 진관 조직을 갖추게 되는데, 각도의 수군 최고지휘관은 수군절도사이었고, 그 아래 수군첨절제사, 만호로 연계된다. 현존하는 진성들은 세조 때 마련된 진관체제에 의해 수군은 선상근무를 원칙으로 하던 수군에게도 변화가 일어나 기항지 근처에 축성하게 되었다. 진성에 수군의 군수물자를 보관하고, 만호 등 관계자의 주재처로 삼도록 하였다.
수군 진
성종 16년 3월 경상도 및 전라좌수영 관하의 설보 대상 처 16곳을 선정하면서 이후 성종 19년부터 4년간에 걸쳐 거제 등 경상우수영관하와 전라좌우영 관하의 수군진들이 축성되었고, 특히 중조대의 삼포왜란은 이러한 연해 수군포구에 대한 축성을 더욱 촉진시켰다. 이러한 시기에 축조된 진성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조선 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진관체제로 지방군제가 확립되면서 전국적인 방위체계가 마련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해안지대에 수군 진의 증설과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미 마련된 산성에 진을 설치하거나, 적의 접근이 용이한 해안에 접한 곳에 진을 마련하는 경우 이를 둘러싼 축성이 진성이다. 이러한 진성은 삼도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진성들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진성으로 진도의 남도석성, 태안의 안흥진성, 소근진성 해남의 이진성지, 고흥 발포만호진성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그 외 탐라순력도에서 보이는 명월진성과 별방진성 등의 그림에는 구체적인 행사장면을 보여주는 그림이 전해진다. 지금까지 진성, 진관체제, 수군 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