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조운제도의 발전과 조선시대 창성, 구조적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세곡 보관과 방어를 위한 창성의 구조와 기능, 아산 공세리 창성을 중심으로 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조선시대 재정 및 방어 시스템을 살펴본다.
조운제도
나라의 중요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곳에 쌓은 성을 말한다. 주로 세곡을 보관하는 곳에 마련하였다. 이러한 조운제도는 고려초부터 제도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운제는 조창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창이란 각 지방에 세수를 수집, 보관하는 창고이며, 수취된 세곡을 선적, 출하 시까지 보관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조창은 선박이 직접 입, 출항할 수 있는 곳으로 해안에 접해있는 해창과 수로 연변에 접해 있는 강창이 있다. 이러한 창고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외곽에 둘러쳐 마련한 방어시설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조운제도가 제도화된 것은 고려 때부터라 할 수 있다. 고려 왕조는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면서 지방통치를 위해 군현제를 정비하였고, 이를 토대로 재정기반을 충실히 하기 위해 조운을 제도적으로 정비하였다. 이 시기는 대개 10세기 초인 정종 때로 보이며, 이때 세워진 조창으로 강운으로 원주의 흥원창, 해운으로 아산의 하양창을 비롯한 여러 조창이 있었다. 이후 문종 때 황해도 장연에 안연창이 설치되어 13창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창성
조선시대에는 한양이 도읍지로 정해지는 결정적인 이유의 하나로 조운이 적합한 한강을 끼고 있는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조운제도는 대체로 고려왕조의 것을 복구하는 방향에서 정비되었다. 조선초기의 조창은 창고라고는 하지만, 창고시설도 마련되지 않은 곳이 많았으며, 대체로 강변이나 바닷가에 넓은 평지에 약간의 토축을 하는 정도의 시설이었다. 석성으로 마련된 창성을 마련한 예로 아산 공진창의 창성이 있다. 창성으로 축조된 성곽 유구가 남은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창성을 마련한 기록으로 세종 32년 양성지가 올린 비변책 중에 “국가의 대적은 으레 서북쪽에서 오는데, 이제 강창이 강변에 있으니, 비옵건대 용산에 창성을 축조하고” 숙종 10년 이단하가 사창에 관한 절목을 올린 내용 중에 “연안, 백천 등에 해창을 두고 창성을 마련하여 조적곡을 거두어 두었다가 강도가 급할 때에 구제해야 하겠습니다.” 등의 기록이 보인다. 아산 공세리의 창성은 인조 9년에 마련한 것으로 축조목적은 세곡의 보호에 있었다. 공세곶창은 당초 당진군의 면천현에 있던 조창을 성종 9년에 공세곶으로 옮기고, 인조 9년에 창고를 보호하기 위한 창성을 쌓았음을 밝히고 있다. 기록상의 창성 둘레는 380척이고, 성벽높이는 5척 5촌이었다. 성곽의 구조는 잔존유구로 보아 중앙지역에 공세창고를 비롯하여 관아시설과 민가까지 포함하고 있다. 또한 창성은 석축으로 편축된 성곽형식이다. 조선조 중기에 마련된 읍성이나 진성과 같은 성곽 구조로 세곡의 출납이 편리한 입지에 마련되었다.
구조적 특징
창성은 일반성곽과 비교하여 보면, 구조상의 큰 차이점은 크게 없다. 창성은 읍성과 달리 관아건물이 들어설 핵심지역에 규모가 큰 창고나 야적장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창고를 중심에 두고 외곽에 성벽을 둘린 형식 외에는 성곽구조상의 별다른 특징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산 공세리의 창성지는 곶으로 된 지형에 세곡선의 접안이 편리한 장소에 문지를 마련하여 세곡을 출납하기 위해 편리한 장소에 성문을 마련하였다. 아산 공세리의 창성의 경우 둘레는 크지 않으나, 성문 2개인데, 이중 북문은 선박의 접안에 편리한 곳으로 우마차를 이용해 세곡운반이 가능한 통로구조이고, 동문은 이 성의 주출입문으로 육로에서의 접근이 용이한 곳이다. 아산 공세리의 창성은 아산천과 삽교천이 분기되는 아산만에 접한 곶 지역으로 이 일대를 관측하기 편리하나 봉우리를 포함하고 있다. 성 내외는 세곡을 관리하는 주거지도 보이며, 성곽은 봉우리와 평지를 포함하는 편축성 형식의 성곽이다. 지금까지 조운제도의 발전과 조선시대의 창성, 구조적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