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조선의 도성 축조와 변천 과정을 상세히 다루어 보겠다. 조선 초기, 태조 때 대규모 도성 축조, 세종 때의 전면적인 도성 개축, 이후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을 거치며 겪은 도성의 파괴와 숙종, 영조, 고종 때의 수차례 수축 과정을 설명한다. 특히 도성의 축성 기술과 재료의 변화, 성문 구조의 변화 등 건축적 세부 사항도 살펴보며 한성 도성의 변천 과정을 종합적으로 알아보겠다.
조선 초기 도성
조선은 송도에서 개국하고 3년 만에 당시 이경이었던 남경으로 천도함으로써 한성이 조선의 도성이 되었다. 태조는 한양으로의 천도를 위하여 먼저 궁궐과 종묘를 축조한 다음, 이듬해인 태조 4년 9월에 도성축조를 위해 도성축조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개국공신 정도전으로 하여금 성터를 측정토록 하였다. 도성의 축조위치는 백악, 인왕, 목멱, 낙산 등 4개의 산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하였다. 태조 5년 봄 49일간 동북면의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서벽면의 평안도의 민정 118,070명을 동원하여 산지에는 석축으로 길이 19,200척, 높이 15척, 평지에는 토성의 길이 10,300척, 하부 폭 25척, 상부 폭 18척, 높이 25척으로 축조하였다. 공사구간은 북악을 기준으로 97자구로 나누어 매구는 600척, 천자문의 “천”자에서 “적”자까지 구간을 매겨 매 구간에는 판사, 부판사와 12명의 관료를 두어 공사를 담당케 하였다. 이 기간 중에 동대문지역 일대와 성문을 제외한 40,300척의 성벽을 완성하였다. 2차 공사는 같은 해 가을인 8월부터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의 민정 79,400명을 동원하여, 1차 공사 시 미완성된 동대문구역을 완성하고 성벽을 보수하거나 보강하였다. 동대문 부근 개천(청계천)에 있는 수구에는 홍예를 쌓고 그 좌우를 석성을 축조하였다. 일부 토축된 구간은 석축으로 고치고 4대문과 4 소문을 완성하였다. 성곽공사는 대부분 이 해에 끝마쳤으나 숭례문은 태조 5년에, 흥인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 완성되었다. 이후 정종 1년에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겨가기도 하였으나, 태종 4년에 다시 환도하였다.
개축과 수축
세종 4년에는 태조때 축조된 도성이 약 20여 년이 경과하면서 그동안 퇴락한 곳과 청계천하류의 수문 부족으로 인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도성개축도감을 설치하여 전국에서 322,400명의 민정을 동원하여 평지의 토성을 전부 석성으로 개축하고 성벽도 산지에 16척, 평산 지역에 20척, 평지에 23척으로 높이를 보강하고, 여장도 완비하였다. 그동안 문제가 많았던 동대문지역의 5칸 수문과 그 남쪽으로 수문 2칸을 증설하고, 성 내외의 폭 15척의 순심로를 개설하였다. 이 당시의 성곽의 대대적인 수축으로 당초보다 약 2,300척이 증설된 60,892척으로 성곽의 둘레가 늘었다. 이후 몇 차례의 개보수가 있었으나 부분적인 보수였다. 이후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양 전란을 겪으면서, 도성이 방어시설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유린되는 쓰라린 경험을 겪었다. 숙종시에 도성수축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 가운데 숙종 30년부터 6년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도성수축이 이루어져 숙종 36년에 수축을 완료한 바 있었다. 이 기간에 도성공사는 오군문에서 맡아 수행하였는데 당시 성곽수축에 사용된 석재는 2척 내외의 정방형의 성돌을 수직에 가깝게 축조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영조 21년에는 삼군문으로 하여금 성곽이 허물어진 곳 40여 개소를 여장까지 포함하여 개수하였다. 이때 성첩도 회분을 사용하였으며, 고종 6년 흥인지문을 개축하였는데 이 당시 동대문일대는 지반이 낮아 8척 정도를 높게 하여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과정
태조 때의 성벽은 산지 지역에는 석축으로 높이 15척, 평지 지역에는 토축으로 하부 폭 24척, 상부 폭 18척, 높이 25척으로 조성하였다. 이후 세종 때는 태조 때의 평지의 토성을 전부 석성으로 바꾸었는데, 개수 시에는 성벽높이를 산지 16척, 평산 20척, 평지 23척으로 보강하고, 여장까지도 완비하였다. 태조 때의 축성형식은 규격이 1척 내외의 깬돌을 거칠게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여 난석 쌓기에 가깝게 축조한 형식이었다. 반면 세종 때 개수 시에 축조한 것은 면석의 형태가 태조 때의 거친 깬돌과 달리 장방형으로 가공한 돌을 사용하였는데, 하부에 사용한 성돌은 장대형의 규격이 큰 석재를 사용하였고, 상부로 갈수록 적은 사괴석 규격의 방형에 가까운 부재로 축조하였는데 축조특징은 평축형식으로 하였다. 양란을 겪으면서 폐허된 도성을 숙종 때 개수하면서, 태조와 세종 때와는 완전히 달리 면석을 정방형의 규격 돌로 사용하였다. 모든 성돌을 규격화하여 가로 세로 2척인 정방형의 돌을 잘 가공하여 면석 간의 맞댄 면에 빈틈이 없게 평축으로 수직에 가깝게 축조하였다. 성문은 동서남북 4방향에 대문을 두고, 그 사이에 소문을 두어 모두 8개소의 성문을 두었다. 성문은 태조 5년, 2차 추계공사 때에 대체적으로 성문과 문루가 마련되었다. 이후 세조 3년 한때 남산과 광희문 사이에 통행의 편의를 위해 남소문이 마련된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남소문은 문루는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문인 숙정문은 평상시는 다른 문과 달리 평시에 활용하지 않았다. 북문은 가뭄으로 인한 기우제 등 특수한 경우에만 열었다. 임란 때에는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길에 나서자, 도성을 제대로 활용도 해보지 못하고 유린되었다. 이때 승인문, 숭례문, 돈의문 등 3문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문은 멸실되었다. 멸실된 성문은 한동안 복원을 못하였다가 숙종 때 도성수축시 복원하였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수축이 계속되어 조선조 말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까지 조선 초기 도성, 개축과 수축, 변천과정에 대해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