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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기 읍성, 체계적인 축성, 읍성 특징

by bibianinto 2024. 11. 26.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초기 읍성부터 이후 체계적으로 축성업무를 추진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읍성은 군사적 방어뿐만 아니라 주민 생활을 중시하여 평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읍성의 특징을 알아보고 목적, 위치, 공간구성도 함께 설명하도록 하겠다. 

조선시대 초기 읍성

조선시대의 초기 태종 대까지 산성에 입보하는 방안이 제시되어 시행되고 있었다. 이때 평지읍성이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고 있기는 하지마는, 도성축조로 인하여 인적 물적 자원의 여유가 없어서 기존의 산성을 수축하여 활용하자는 인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태종 15년부터는 연해읍성 축조에도 관심을 가져 실제로 하삼도에서 읍성축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왜구를 해안 지역에서 막아 피해를 줄이고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적극적인 방어책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세종 원년에 대마도 정벌에서 돌아온 유정현의 연해읍성 축조제안이 있은 이후에 세종 3년에는 경차관을 파견하여 읍기를 심정토록 하였다. 세종 11년에는 연해 각 읍은 매년 농한기를 이용하여 10년을 기약하면 성보가 완고해질 것이라는 허조의 건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에 평조판서 최윤덕을 충청, 전라 경상도의 도순무사로 삼아 삼도의 성보를 수축하는 방침에 대하여 위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성기의 심정 및 감축을 통하여 많은 읍성을 마련하며 왜적 방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이후 하삼도의 축성 관련 업무는 충청, 전라, 경상도 도순무사, 도체찰사, 도순문사가 전담하게 되었다. 이때 최윤덕은 연해의 읍들은 산성 대신 읍성을 축조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여 입보책이 강구되었다. 한편 세종 20년에는 축성신도를 반포하여 성곽을 규식화 하였다. 이듬해 21년까지에도 계속된 흉년으로 필축을 보지 못함을 들어 옹성과 적대를 제외함으로써 민력을 덜어 연해읍성을 빨리 축조하여 대비하고자 하고 있다. 이 제안은 세종 24년 7월에야 옹성, 적대 및 해자를 일시에 필축하지는 못하나 제외하지는 않고 점차 축조하여 나가도록 의견을 보이고 있다. 이때 연해읍성의 완축된 이후에 내지의 읍성은 필축되지 않았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축성을 정역하여 하삼도의 읍성축조는 그치게 되었다.

 

체계적인 축성

 

그러나 세종 28년 4월에는 축성시기를 10월로 정하고, 수년지법에 따라 축성기일을 가감하여 정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과 고통을 줄이는 수년지법을 항식화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동년 9월에는 공역규식을 정하여 좀 더 체계적인 축성업무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세종대의 하삼도에 대한 읍성축조는 백성들의 편의와 왜구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방안으로 입보처를 산성에서 읍성으로 전환시킨 전략전술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문종~단종대의 읍성의 축조는 도체찰사 정분이 세종 때 제정된 축성에 관한 제규식을 지키면서 읍성의 입지조건이 부적합한 곳은 다시 새로운 장소로 심정하게 하였다. 하삼도의 51개 읍성을 그대로 두어둘 “잉구”할 읍성과 물려서 넓혀야 할 “퇴축”할 읍성, 고쳐쌓아야 할 “개축”할 읍성, 그리고 추후에 꼭 쌓아야 할 “수후가축”할 읍성을 구분하여 이를 완축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읍성 특징

 

조선시대의 읍성은 고려시대와 달리 유사시에 대비하여 축성한 목적뿐만 아니라 평시 주민생활을 중시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읍성은 군사적 요해지이면서, 기존의 주요 교통로 상에 발달한 거주지의 주민의 생활공간에 마련하였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신설과 함께 옛 토성으로 된 읍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거나 그 규모를 확장하여 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임란 후에는 치와 옹성, 포사, 포루, 해자 등의 부대시설을 보완하였다. 읍성이 마련된 위치는 대개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이론에 따라 배후에 산이 있고, 전면으로 수계가 형성되는 배산임수형의 위치로 오랜 과거부터 중요 취락이 발달하였던 곳이다. 이 지역은 타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로 또한 열려 있었으므로 그러한 위치는 읍성의 주요 입지가 되었다. 읍성의 공간구성은 대체로 해당 군현의 중심을 이루는 객사와 3단 1 묘의 제사시설, 주변의 마을로 이루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읍성내부에는 왕 또는 국가를 상징하는 시설인 객사와 수령의 근무처인 동헌이 양대 핵을 이루게 된다. 이 시설들의 주위에 각종 관아와 창고 등을 마련하고 그 바깥에 성벽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