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국 왕국들의 국경 방어를 위해 축조된 장성의 역사와 전략적 의미를 다루는 상세한 역사적 고찰로, 고구려와 백제의 장성 건설 과정과 목적을 살펴보겠다.
장성의 정의
장성은 국경지역에 길게 축조한 성곽으로 행성, 또는 관성, 대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국경지역의 지리적인 요충지역에 하나의 축선으로 외적을 방비하기 위해 마련한 성곽으로 그 형태가 길게 늘어선 성곽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고구려의 천리장성이나 고려의 천리장성 등이 있다. 이 외 조선 세종 때의 북쪽 국경지방에 마련한 여러 행성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다. 장성이나 행성은 적의 접근이 쉬운 길목을 가로막을 목적으로 설치한 성곽으로 평지에는 성석을 쌓고 낮고 습한 지역은 참을 파거나 목책을 세우고, 높고 험한 곳은 흙을 깎아내리거나 성보나 연대를 마련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고구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곧 당에 의해 618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후 626년 당나라 태종이 즉위한 후 당과 고구려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당 태종은 국내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세계제국 건설의 야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동돌궐을 침략하는 등 주변 국가에 위협을 가하였다. 영류왕 13년에 당나라 사신 장손사가 과거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투에서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을 헐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당에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서쪽 경계지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북쪽으로는 만주의 중부지역인 부여성에서 남쪽은 발해만이 있는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나 되는 장성이었다. 장성의 축조형식은 기존의 토성들을 연결하면서 쌓은 토축으로 성벽은 폭이 6m, 성벽 높이는 2~3m 내외였다. 장성에는 일반적인 석성에서 보이는 성문이나 문루 등의 시설물이 보이지 않는 성벽 위주의 시설이었다. 고구려의 장성은 무려 16년이나 걸려 보장왕 6년에 완성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영류왕 14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동왕 25년 봄에 왕이 서부대인 연개소문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도록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착공한 때로부터 11년이 되는 해에도 준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리장성은 보장왕 5년에 축성이 끝날 때까지 16년이란 긴 기간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백제의 장성 관련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진사왕 2년에 의하면 “봄에 국내의 사람으로 나이가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관방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으로부터 북으로는 팔곤성에 연하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하였다. 축성이 이루어진 당해 8월에 고구려가 침입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마 북쪽의 고구려에 대비하여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장성의 정의, 고구려와 백제의 장성에 대해서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