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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금성, 월성, 월성의 주변지역

by bibianinto 2024. 11. 8.

신라의 금성과 월성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겠다. 금성은 기원전 37년에 축조된 초기 도성이었다. 그 후 파사니사금 22년에 월성이 세워졌다. 월성 주변에는 대능원과 고분군, 그리고 남천이 흐르고, 황룡사지 일대에서는 방리제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이 글에서는 신라의 금성과 월성, 그리고 월성 주변 지역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신라의 금성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약 1천 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편의상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룬 시기를 전후하여 고신라와 통일신라로 구분하나 도읍지를 옮기지 않아 도성의 변화는 없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첫 궁궐기록으로 현재 남산 서쪽의 창림사 터 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도성인 금성에 관해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 21년(BC 37)에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어 혁거세 26년(BC 33) “정월에 서울 금성에 궁전을 지었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금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금성은 첨성대가 있는 일대로 여겨진다. 이는 최근 첨성대 남측지역에서 조사된 규격이 큰 초석들이 당시 궁궐에 사용된 초석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기원전 37년에 신라는 도성인 금성을 축조하고, 파사니사금 8년(BC 87)에 인접국인 백제와 가야의 침범에 대비하여 성루를 구축하여 대비하고자, 가소성과 마두성을 축조하는 등 일찍부터 축성이 이루어졌다.

월성

파사니사금 22년에 2월에 궁성을 쌓아 월성이라 이름하고 7월에 왕은 월성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여러 기록으로 보아 신라는 지금까지 금성으로 보는 성곽유적이 조사된 바 없으므로, 이를 감안한다면 도성인 금성은 대규모의 나곽을 지닌 성곽이라기보다, 궁궐 주변을 담장으로 두른 정도를 의미하지는 않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혁거세 21년에 궁성을 쌓고, 금성이라 하고 파사왕 22년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이라 부르고, 혹은 재성이라 이름하였다. 주위는 1,023 보이고 신월성의 북쪽에 만월성이 있는데, 주위는 1,838 보이고, 신월성의 동쪽에 명활성이 있는데, 주위는 1,906 보이고, 또 신월성의 남쪽에 남산성이 있는데, 주위는 2,804보이다. 시조 이래로 임금은 금성에 거처하였고, 후세에 이르러서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 신라는 처음에 고구려와 백제와 서로 지경을 정하여 혹은 서로 화친하고 혹은 서로 침구하다가 뒤에 대당과 함께 두 나라를 침범하여 그 땅을 평정하고 드디어 구주를 설치하였다.

월성의 주변지역

현재의 반월성은 동서 890m, 남북 260m 내외의 동서로 긴 반달모양의 토성으로 둘레가 2,340m이다. 월성 북편으로는 북천, 서천으로 둘러쌓인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어 이 일대가 신라 도성의 중심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월성을 중심으로 북서편의 대능원과 대형 고분군이 있고, 북동 편으로는 임해전지와 전랑지, 황룡사지 낭산 등이 위치해 있다. 월성 남쪽으로는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해자구실을 하며, 남천을 건너면 작은 평야를 지나 바로 남산에 이른다. 신라는 왕도를 방비하기 위한 나성은 만들지 않았다고 보나, 수도인 금성을 중심으로 나성의 역할을 하는 요로를 통제할 수 있는 산성은 구축하였다. 즉 동쪽에 명활산성, 남쪽에 남산성, 서쪽에 선도산성이 그것이다. 그 외곽지역에 관문성, 부산성, 북형산성 등을 겹으로 배치하여 두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월성은 파사니사금 22년 봄에 쌓았는데, 그 주위가 1,023 보라 하였고, 신 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월성은 부의 동남쪽 5리에 있다. 파사왕 22년에 쌓았으며 형상이 반월 같은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흙으로 축조하였는데 둘레가 3,023척이다.”라 하였다. 그 외 동경잡기에서 금성은 부 동쪽 4리에 위치하며 둘레 2,407척의 토축이라 하였다. 이를 통해 도성인 금성은 궁성과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방리제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최근 황룡사지 일대에서 방으로 보이는 담장지가 조사되었는데 방리제의 한 구획은 가로 세로 140x160m 내외로 조사되었다. 월성은 평탄한 자연지대 위에 필요한 토루를 돌과 흙을 섞어 토축해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천과 맞닿는 지역 외는 토루는 인공적으로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고, 문지 지역의 구조를 통해서도 일부 알 수 있게 한다. 성내에는 황궁의 유구로 보이는 건물지와 연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