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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관문성, 고려의 천리장성, 조선의 행성

by bibianinto 2024. 12. 4.

지난 글에 이어서 장성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겠다. 신라의 관문성, 고려의 천리장성, 조선의 행성을 통해 각 시대별 북방 방어 전략과 축성 목적, 규모, 특징을 자세히 살펴본다. 각 시대의 지리적 방어선과 군사적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신라의 관문성

 

신라의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장성으로 관문성이 있다. 관문성은 신라 성덕왕 21년에 왜구를 막고자 축조한 성이다. 이 성은 경주시와 울산광역시의 경계지역으로 외동읍 부근의 산지에 축조된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으로 된 행성과 산성으로 현재 성문지, 수문, 창고지 등이 남아 있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 모벌관문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문무왕 1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길이가 12km에 달한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 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축조방식은 잘 다듬은 가공돌과 자연석에 가까운 깬돌로 축조한 쌓은 산성인데,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해 볼 때 성 쌓기 방식에서 발전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의 천리장성

 

고려의 천리장성은 덕종 2년 동북방면의 여진족과 서북 방면의 거란족을 방비할 목적으로 축조한 장성이다. 천여 리에 걸친 석축산성으로 일명 고려장성이라 불린다. 장성은 석성으로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거란, 여진 등과 국경을 설정해 침입을 막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덕종 2년에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관방을 쌓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실제로는 이미 현종 때 쌓은 성, 진을 연결하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압록강 어귀로부터 지금의 의주 지역인 위원, 흥화, 정주, 영해, 영덕, 영삭, 정융, 영원, 그리고 평로, 삭주와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인 맹주, 평안북도 운산인 운주, 희천인 청새, 평안남도 개천인 안수 등을 지나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지역인 요덕, 정변, 화주 등과 연결되어 동해로 이어진다. 평안북도의 맹산, 운산, 개천 등 13개 성을 거쳐 함경남도 영흥 지역의 34개 성으로 연결되어 동해에 이르는 성이다. 제주에 남아있는 환해장성은 연해에 환축한 성으로 둘레가 3 백여리에 이른다. 원종 11년 진도에 있던 삼별초가 제주도로 들어오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패하였고, 이긴 삼별초는 또다시 관군을 막기 위해 계속 성을 쌓았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으로 변하여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조선의 행성

 

행성이란 조선 세종 때의 북방지역에 마련한 장성을 말한다. 세종 때의 행성은 처음으로 세종 22년 우의정 신개의 건의에 의해 병조판서 황보인과 참판 신인손과 상의한 후 행성을 축조하기로 하고 4개월에 걸쳐 조사한 결과를 올렸는데, 이 가운데 방새처 128 곳의 행정 후보지가 선정건의 됨으로써 본격적인 축성은 세종 23년부터 세종 32년에 이르기까지 10년에 걸쳐 축조되었다. 조선의 행성은 행성전체의 축조길이가 고려의 천리장성의 절반정도로 고려 장성은 성벽의 폭과 높이가 다 같이 24척으로 도성의 수준과 유사했음을 알 수 있다. 행성은 두만강 변에서는 높이가 대략 12~15척, 압록강변에서는 대략 4~7척으로 고려장성의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압록강변의 행성은 그 높이가 4척으로 비교적 낮았던 이유는 적병출입의 차단 목적보다는 군마 출입의 불편을 통한 통제 및 억제의 효과를 높이려는데 기본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신라의 관문성, 고려의 천리장성, 조선의 행성에 대하여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