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성곽역사는 이미 고조선에서 기록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그중 남한산성 기록과 현재의 축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인지 이 글에서 살펴보겠다.
성곽역사
우리나라 성곽역사는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은 한반도 서북쪽으로부터 요동지방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면서, 이미 기원전 4세기경 중국과 투쟁하면서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 사마천 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BC 109)에 한의 무제는 고조선 왕검성을 침범하여, 1년여에 걸친 성곽전투를 벌였던 기록이 보인다. 이를 통해 기원전 2세기에 이미 난공불락의 성곽을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등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였고,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에서 나라의 보전을 위해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 축성이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축성을 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외적을 효과적으로 물리친 사실에 대해, 조선초기의 군사전략가 양성지의 문집인 눌재집에서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 불려질 만큼 많은 성곽을 축조하였던 나라였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지인데, 이러한 지형적 특징을 활용하여 대부분의 성곽은 산성으로 축조하였다. 산성이 지닌 지형적인 이점)을 잘 활용하는 전통의 전술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임진왜란을 몸소 체험하였던 서애 유성룡이 우리 주변의 야인, 왜, 조선 간의 군사적 장기에 관하여 언급한 바 있었다. 즉 오랑캐의 장기는 기병이며, 왜의 장기는 단병이고, 우리의 장기는 성에서 궁시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라하였다. 즉 우리나라는 삼국이래 전통적으로 성곽을 잘 이용하는 성곽 전에 능하고, 활(弓)을 잘 다룬 민족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 전국에 걸쳐 많은 성곽유적이 들 수 있다. 최근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남한지역에만 성곽유적이 1,848개소로 조사된 바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산성이었다.
남한산성 기록
남한산성은 우리나라의 산성중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성곽으로, 남한산성과 관련된 기록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한성백제시대로 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되어 왔던 기록이 보인다. 중정 남한지에 의하면,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남쪽 40리 떨어진 곳을 광주부라 하니, 백제의 옛 서울이며, 신라의 남한산주이다 라고 하였다. 행궁터를 중심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행궁지의 뒤쪽에서 백제주거지 2개소와 저장용 구덩이 8개소 등이 조사되면서 항아리, 시루, 주발 등의 백제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조사된 내용으로 보아, 도읍지였음을 주장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자료로 보여 앞으로 발굴성과에 따라 주장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처음 성)을 쌓았으며, 이 당시는 주장성이라 하였으며, 성의 둘레는 4,360보(약 8㎞)라 하여 구체적인 성곽의 규모를 밝히고 있다. 이는 행궁지의 발굴성과에서 행궁의 하궐지에서 확인된 대형건물지(가로 53.5 m×세로× 18.0m)와 함께 출토된 유물들은 이 시기의 것임이 고증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당시 광주부사였던 이세화의 묘지명에 의하면, 몽고 1차 침입(1231)때 광주군민들은 광주성으로 피하여 몽고군의 공격을 방어하였고, 몽고 2차 침입(1232) 때에도 살례탑이 이끄는 몽고군이 광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이세화가 물리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의 초기에는 이 성을 일장산성이라고 하고, 성 둘레가 3,993 보이고, 성내에는 창고와 우물 7개소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고, 성내에 논과 밭이 124 결이나 되었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보인다. 이후 선조와 광해군 때에는 남한산성의 수축을 위한 논의가 있었고, 광해군 13년(1621)에 실제로 청의 침입을 막고자, 수축을 한 바 있었다.
현재의 축성
현재의 축성은 인조가 즉위하면서, 이괄의 난을 계기로 수어사 이서에게 명하여 옛 성터를 따라 축성을 하였다. 이 당시 축성책임을 맡은 이서는 전국의 승려들을 소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는데, 동남쪽은 이회에게, 서남쪽은 벽암대사에게 맡겨 2년 만인 인조 4년(1624)에 완료하였다. 이후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 때에는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어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45일간의 격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강화도의 함락소식과 식량부족과 혹한 등으로 인하여 항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끝내 함락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의 경험을 잊지 않고, 원성 외에 취약하였던 성곽시설의 보완을 하게 되었는데, 보완된 시설로는 숙종 12년(1686)에 봉암외성, 숙종 19년(1693)에 한봉외성을 쌓았고, 숙종 45년(1719)에 옹성, 영조 28년(1752)에는 신남성의 양돈대를 축조하였다. 이후에도 조선조말 정조 3년(1779)에 다시 원성과 4대문에 수축 등을 하였고, 이는 일제강점기 훼철되기 전까지 다른 산성과 달리 남한산성을 관리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