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방 체계의 핵심 방어 시설인 보(保)의 정의와 역사를 알아보겠다. 국경과 해안 지역의 작은 요새, 보의 설치 목적과 군사적 기능, 규모, 그리고 대표적인 석창성지의 건축 특성을 통해 당시 방어 시스템의 면모를 살펴본다.
보의 정의와 역사
보란 본래 흙이나 돌로 쌓은 작은 성을 뜻한다. 때로는 돌로 쌓은 것을 성이라 하고, 흙으로 쌓은 것을 보라 하여 구별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의 보는 대부분 석성이었고, 토성이나 목책은 소수였다. 국경지역의 요충지에 설치한 작은 요새로 주민이 밀집하여 모여 사는 곳이 적의 접근이 용이한 국경이나 해안일대에 마련하였다. 이러한 보는 행정상 읍성이나 진성을 마련하는 여건이 되지 않아 규모가 작고 격이 낮아 보를 만들어 유사시에 대비하고자 축조하였다. 보에는 소수의 군사를 배치하고 하급 지휘관을 임명하여 지휘하도록 했으며, 일부 보에는 군사만 배치하였다. 그러나 보의 규모는 둘레가 100척이 못 되는 것부터 3,000척이 넘는 것까지 다양한 규모로 조성되었다. 보의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에 보가 만들어졌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말에 동여진의 해구와 왜구에 대비하여 연해안 지역에 성보를 마련하자고 주장한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의 보에 대한 기록은 연해지역의 주민들을 위해 30~50리마다 경작할 땅이 있는 곳에 평이한 지형이며 땔감과 물이 있는 곳을 골라 200~300호를 기준으로 하여 성보를 쌓고 살면서 지키도록 하자는 의도였다.
설치 목적
조선시대 들어서서 읍성의 축조와 함께 진이나 읍에서 멀리 떨어진 연해 지역에 경작지를 개척하여 모여 살게 되자, 이를 보호하기 위해 인구가 밀집 취약지구에 진성이나 읍성보다는 규모가 작은 보를 마련하여 수졸을 파견하거나 거주 주민의 입보처로 마련하였다. 이러한 보는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진장이나 수령이 파견된 성과는 구별하여 명칭도 성이 아니라 그 하급단위로서 보라 불렸다. 세종 15년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국경지역에 행성을 쌓으면서 진에 버금가는 국방상 요충지에는 구자를 증설하고 만호를 임명하여 지키도록 하는 한편, 구자에 성을 쌓아 주민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한 조치에 따라 보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뒤에 장성을 따라 2개 도에 걸쳐 수십 개의 보가 신설되어 만호나 권관 등을 두어 지키도록 했다. 15세기 말엽 이후 왜구 침입에 대비해 국방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남부 해안 지역인 김해, 흥양과 남해도 거제도 등 큰 섬에도 몇 개의 보를 설치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북방에 설치되었는데, 1530년 당시 사용 중인 보만 북방의 2개 도에 84개였고, 남방은 6개에 불과했다. 보는 조선 후기에 다소 줄었으나 말엽까지 남아있었다.
석창성지
대표적인 보의 예로 여천 석창성지가 있다. 둘레가 1,479척이고 높이가 10척이라 하였으며 성안에 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은 한쪽면이 172m인 방형의 형태로 성벽은 3m 높이로 남아있다. 성벽에는 치의 흔적이 보이고 동,서, 남쪽에 3곳의 문지가 있었다. 성 외부에는 폭 4~5m, 깊이 2.0m의 해자가 있으며, 성내의 건물은 모두 훼손되고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 석보는 평지에 방형으로 축조한 석성으로 축조방식은 15세기 중엽 연해읍성의 널리 사용된 형식인 대석으로 수직에 가깝게 편축하였다. 면석으로 규격이 큰 대석을 사용하고 대석 사이의 틈에는 쪽 돌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성 내측은 규격이 작은 깬돌로 층단으로 축조한 다음 그 외부를 흙으로 덮어 경사지게 마감 처리한 형식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보의 정의와 역사, 설치 목적, 석창성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