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기원후 663년까지 31대에 걸쳐 678년간 존속하였는데, 도읍지를 중심으로 한성시대와 웅진시대 그리고 사비시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한성시대의 하남위례성, 웅진시대의 공산성, 사비시대의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각 시대의 특징과 성곽 구조를 설명하겠다. 각 도읍지의 위치와 역사적 배경, 성벽의 구조 및 축성 기법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 백제의 발전 양상을 살펴보도록 한다.
백제 한성시대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지금까지 풍납토성, 몽촌토성, 이성산성 등 학자마다 각기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으나, 근년에 와서 풍납토성의 그간의 발굴성과의 결과로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에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략하니 편안한 날이 드물다. 하물며 지금 불길한 징조가 자꾸 나타나고 국모가 돌아가니 스스로 안정될 수 없는 정세라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일전에 순시를 하다가 한수 남쪽의 땅을 보니 땅이 기름진 것이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오래 안정을 할 수 있는 대책을 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7월에 한산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8월에는 마한에 사신을 보내 천도를 알리고 강역을 확정하니 북으로는 패하, 남으로는 웅천, 서로는 대해에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에는 성과 궁궐을 세웠다. 새로 천도한 한산하의 책을 세워 신 도읍지는 현재 최초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과 어떠한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일반적으로 다음 해인 온조왕 14년에 천도하고 온조왕 15년 봄 정월에도 궁궐을 축조한 기록이 보인다. 천도와 궁궐축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이어 온조왕 41년 기사에 의하면 “2월에 한수 동북의 모든 고을 사람으로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하였다. 이로서 온조왕 13년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긴 새로운 도성과의 한산하의 책과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히 다른 곳일 것으로 여겨지나 주변일 가능성이 크다. 하남위례성과 한산 하의 책성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 뒤에 온조왕 15년의 백성을 신도로 옮겨 살게 한 위례성은 28년 만에 수리하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서 천도한 한산하의 책을 마련하여 위례성의 백성을 옮겨 살게 한 신도와 이전의 하남위례성을 구분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는 출토유물이나 축성기법으로 보아 강동구 천호동에 위치한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풍납토성은 둘레가 3.5km에 이르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대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 나가 현재는 약 2.7km가량 남아 있다. 토성의 평면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한강 변에 평지에 마련된 성으로 구간마다 다소 차이를 보이나 성벽 높이가 11~14m, 기저부 폭은 약 43m에 이르는 판축으로 조성한 토성이다.
웅진시대
웅진시대의 도성은 왕성으로 보는 공산성으로 여겨지는데, 성의 북쪽은 금강을 접하고, 해발 85m~110m 내외의 공산의 산세의 능선을 이용하여 성벽을 둘렀다. 이 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의 기록은 보이지 않아 명확치 않다. 그러나 공산성은 한성에서 남천 하기 이전에 이미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성곽이 미리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공산성은 산지의 능선을 따라 성곽을 축조하였는데, 성내에는 계곡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포곡식 산성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시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성인데, 일반적으로 왕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현재까지 공산성 외부로 이렇다 할 성곽 등 중요 유적이 발견된 바가 없어, 현재로서는 성내에 조사된 유적밖에 인정할 수 없는 실정에 있다. 공산성은 동남쪽 일부가 2중의 성벽으로 된 구조로, 전체둘레는 2,660m인데, 그중 석성이 1,925m이고 토성이 735m이다. 석성은 조선조 때 개축한 것이고, 동문지 밖의 토성 735m는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보인다. 토성은 하단 폭이 8.5m, 상단 3m, 높이는 1m 내외이다. 공산성은 각 방향마다 성문은 4개소인데, 현재는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만 있고, 서문은 최근 복원되었으며, 동문은 문지가 조사되어 보고된 바 있다. 성내에는 추정왕궁지, 장대지, 임류각지, 만아루지, 연지, 기타 각종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사비시대
기록상 부소산성은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의 이름이 부소산이어서 부소산성이라 불리고 있다. 사비도성은 부소산의 남측기슭의 관북리의 추정왕궁지를 중심으로 북쪽에 부소산성이 위치해 있고, 산성과 연결되는 좌우측으로 연결되는 나성을 전부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다. 사비도성은 한성이나 웅진시대의 공산성과는 달리 배후에 부소산성과 외곽에 나성까지 함께 갖춘 발전된 성곽 형식이다. 부소산성의 축성시기는 웅진시대에 사비로 천도하기 전에 이미 마련되었다고 보고 있다. 현재의 부소산성은 군창지 지역과 사비루 지역의 산지능선을 포함하는 구간을 둘린 성벽이어서 성내에는 이들 사이의 계곡까지 포함하고 있어 딱히 퇴뫼식산성이나 포곡신산성이라 할 수 없는 지형적인 특성으로 보아, 이를 복합식 산성이라고 한다. 조선조의 기록의 부소산성에 대해, “반월성은 석축으로 길이는 13,006척인데, 곧 옛 백제의 도성이다. 부소산을 안고 축조되어 그 양끝은 백마강에 이른다. 형상이 반월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 하였다.” 라 하였다. 현재 조사된 부소산성은 둘레가 2.5km내외이고, 성문은 4개소에 성문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동문지와 남문지가 조사되었다. 동서 2 문지는 부소산성에서 좌우 양편으로 나성과 연결되는 지점의 안쪽에 근접해 위치하고 있어서, 나성 외부로부터 직접 산성으로 들어올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은 통일신라시대에 초축 또는 보완된 토루 구간이 1,580m 내외이고, 군창지를 둘러싼 퇴뫼형 토루는 840m로 확인되고 있다. 토루의 축조 기법은 기본적으로 판축 방식이었다. 토축방법은 위치에 따라 단면의 구조와 축성방법이 다소 달리 보이는데, 일반적인 토성은 폭 5.0~6.4m 내외이다. 나성은 부소산을 기점으로 하여 그 동쪽을 뻗어 내려 청산성을 경유하여 석모리에 이르는 북측의 나성과 능산리의 서쪽 산을 타고 내려와 필서봉을 경유한 다음 백마강에 이르는 동나성, 부소산의 서록에서 뻗어 백마강의 자연 호안으로 구아리, 구교리, 동남리를 거쳐 군수리에 이르는 서나성, 그리고 최근 존재여부가 논란이 되는 궁남지에서 남나성 등이다.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인식되는 나성은 북나성, 동나성, 그리고 부소산성과 직접 연결되는 서나성 일부 밖에 없다고 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나성의 총연장은 6.7km에 달한다. 이를 구분하여 살피면, 북나성 0.9km, 동나성 5.4km, 그리고 서나성 0.4km이다. 지금까지 백제의 도읍지를 중심으로 한성시대와 웅진시대 그리고 사비시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