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고대 궁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백제 한성시대 풍납토성, 웅진시대 공산성, 사비시대 부소산성과 익산 왕궁리 유적의 구조와 특징을 설명하고, 신라의 월성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실측 데이터를 통해 궁성의 건축 양식과 규모를 소개하겠다.
백제
백제는 초기 한강변의 한성시대의 궁성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한산 아래 방책을 세우고 처음 도읍을 정하였다는 기록과 이후 근초고왕 26년에 다시 도읍을 한산성으로 옮겼는데 이 성은 지금 어느 곳인지 확실치 않다. 최근의 발굴성과로 보아, 풍납토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나, 일부는 풍납토성을 포함하는 주변의 산성까지 포함하여 보는 견해도 있다. 풍납토성은 타원형의 토성으로 전체 둘레가 3.5km 내외이고, 성벽은 남북 1.2km 동서 0.6km로 남북이 긴 형식이다. 성벽인 토루는 마치 사다리꼴 형식으로 판축을 하였고, 내벽에는 석열이 성벽을 따라 일정폭으로 강돌이 깔려있음은 왕궁리 유적의 부석 시설과 비교해 볼만한 시설의 하나로 생각된다. 전반적인 성곽형식은 평지의 장방형으로 한강 쪽인 서벽은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다. 성 전체 둘레가 3,470m(미복원: 1,470m 포함)이며 성벽높이는 현재 토루의 하부가 주변지형에 일부 묻혀 있는데, 토성 기저부의 폭이 약 43m이고, 토루의 높이는 14m(4.0m 정도 묻혀있음) 내외로 조사되었다. 웅진시대의 공산성이 궁성인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규모를 보아 현재의 공산성은 궁성으로 추정된다. 사비시대의 부소산성도 산성의 남쪽 아래 추정 왕궁지가 조사된 것으로 보아,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가 궁성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백제의 궁성은 웅진시대의 공산성과 사비시대의 부소산성으로 추정되고, 이 유적들의 궁성은 확실히 밝혀진 바 없고, 위곽시설인 궁장도 조사되지 않아 현재로서 알 수가 없다.
익산 왕궁리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발굴결과, 백제후기에서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는 시기에 마련된 궁성과 사찰 유적이었다. 궁성유적은 사찰유적의 하부에 위치해 있는데, 궁장의 둘레는 약 1.5km로,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다. 남북방향이 축으로 궁장의 남북방향인 동, 서벽은 492m, 남벽과 북벽이 각기 237m 내외의 규모이다. 이러한 규모라면 평지성인 고구려의 안학궁과 비교된다. 안학궁성은 토성으로 마름모 형태에 가까운 정방형으로 둘레는 622m이다. 안학궁에도 정면인 남벽에는 중앙문지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문을 두어 3개의 성문이 마련된 형식과 같이 익산 왕궁리에도 3개소에 마련된 성문형식도 이와 같은 형식이다. 왕궁리에서 조사된 성벽 형식은 궁장으로 보인다. 발굴결과 궁장유구중 잘 남은 유구는 높이가 0.7~1.0m 내외이나, 궁장의 폭은 3m였다. 이러한 규모의 궁장지역에 출토된 다량의 와편과 잔존한 궁장의 장석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법궁인 경복궁의 궁장형식과 규모와 형식이 유사하다.
신라
신라는 도읍지를 서라벌에 두고 한번도 수도를 옮기지 않았는데 이 당시 궁성은 월성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에 축조되었다. 자비왕 18년에 한 때 궁성이 명활산성으로 옮겨 사용하였다가 소지왕 1년부터 월성으로 다시 옮겨 활용되기도 하였다. 월성은 기록상 둘레가 1,023보로, 실측결과 2,400m 내외의 동서로 긴 자연지세를 이용한 곡선형의 성곽이다. 반월성의 성벽은 일정한 형식을 띠고 있지 않은 형식으로 자연능선을 활용하여 성벽을 조성한 형식의 성곽이다. 성벽은 토성으로 대개 10~18m 폭의 토루로 마련되었다. 자연 지세를 활용하여 축조된 토루인데, 주변 하천에서 많이 보이는 천석으로 세마된 20cm 내외의 둥근 석재와 흙을 함께 섞어 토루를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토루 상단은 강수로 인해 세굴되어 둥근 석재가 가지런히 노출되어 남아 있다. 월성에는 남문을 비롯한 8개의 문지가 조사되었다. 지금까지 백제와 신라의 궁성에 대해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