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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성의 개념, 역사적 발전 과정, 산성축조

by bibianinto 2024. 11. 29.

이번 글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방어 전략인 대피성의 개념, 역사적 발전 과정, 그리고 유사시 대비를 위한 산성 축조와 청야전술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대피성의 개념

평시 방어에 유리한 산지에 성곽을 마련하여 둔 다음, 유사시에 사전에 마련한 인근 산성에 입보하여 농성하는 성곽을 대피성이라 한다. 대피성으로의 적지는 평시 거주하고 있는 인근의 주변 산지이다. 대피성의 활용은 삼국시대 초기 도성제에서부터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평상시의 거주여하에 따라 상주하는 성과 구분하기 위한 개념의 성이라 할 수 있다. 즉 대피성은 도성이나 읍성과 같이 평상시 활용하는 성의 대응개념이라 할 수 있다. 지형적으로 산성에 해당되는 성곽은 평시에 생활하기에는 불편하여 대개 대피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시에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성내에 필요한 만큼의 식량과 무기를 보관하여 두었다가 새로운 준비 없이 입보하여 대적하기 위해 마련하였다.

역사적 발전 과정

고대로부터 주변에 지형적으로 유리하나 산성에 입보하여 성곽전투를 하여 외적을 효과적으로 물리친 오랜 실전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대피성이 마련된 곳은 비록 지형이 험하고 통행에 다소 불편하더라도 산성을 마련해 두는 것은 유비무환의 방책이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초기부터 도성이나 지방의 군, 현 단위로 근거지의 주변에 산성이 마련됨으로써 대피성을 축조하였다 하겠다. 이것의 예로 고구려가 최초 도읍지인 흘승골성에서 집안의 국내성으로 옮기면서 궁성인 국내성을 마련하고, 인근 산지인 위나암성을 쌓아 대피성으로 삼았으며, 다시 평양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면서도 궁성인 안학궁성과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인근 대성산에 대성산성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 태종대를 거쳐 세종 22년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산성제에 의존하여 국가방위책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대피성은 전통적인 전술인 청야입보책을 수행하기 위한 대책으로 유사시에 평상시에 거주하고 있었던 가사와 전답을 깨끗이 정리하고, 미리 준비된 성에 들어가 농성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고구려는 수, 당의 침입을 받았을 때에 산성에 입보하여 큰 효과를 보았으며, 태조대의 곡산부사 전이에 상서문에서 고구려의 안시성을 예로 들면서 산성제의 유리함을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산성에의 입보농성은 오랜 전쟁 경험을 통하여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특히 몽고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관민이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전술이 주민들의 생명보전대책이었다.

산성축조

조선시대의 도성인 한성 주변에 남한산성 등이 수도방위에 필요한 대피성이 마련되었고 지방에도 전국적으로 유사시에 입보할 산성을 지역별로 지정하여 마련해 두었다. 조선 정종대에도 이서가 산성제가 최상의 비변책임을 내세워 농한기를 이용하여 산성의 수축을 주장하고 있다. 태종 9년에 경상도 경차관 한옹이 편민책을 올릴 때, 물이 풍부한 산성을 3년 동안의 농한기를 이용하여 수축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이러한 시책으로 이듬해 경상도 6곳의 산성과 전라도 6개소의 산성을 수축하게 된다. 이 당시 수축한 산성은 경상도, 전라도 여러 고을의 산성들이었다. 창녕현의 화왕산, 청도군의 오혜산, 감음현의 황석산, 선주의 금오산, 창원부의 염산, 계림부의 부산, 남원부의 교룡, 담양부의 금산, 정읍현의 입암산, 고산현의 이흘음산, 도강현의 수인산, 나주의 금성산성 등이었다. 태종 때 산성수축에 따른 비변법을 마련하였는데, “사람이 중하게 여기는 바는 부모처자에게 있는데, 위급할 즈음에 만약 모두 헤어진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 힘을 다하도록 하기에는 어렵습니다. 각도 각 고을의 3~4식 정도 안에 하나의 산성을 설치하되, 구기가 있는 것은 거듭 수리하고 구기가 없는 것은 땅을 골라 새로 지어서 안에 창고를 설치하고 양향을 저축하여 만약 위급한 일이 있을 때 그 부모처자로 하여금 모두 산성에 모이게 한다면, 사람마다 모두 능히 그 힘을 다할 수 있을 것이고, 감히 배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먼저 양계 및 풍해도에서 시작하소서.”라 하여 그대로 따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의주부윤 엄황이 치계하기를 “경내에 있는 백마산성은 바로 고성입니다. 반드시 그 성은 수리하여야 거기에 웅거할 수가 있는데 일이 없을 적에는 농사를 지어 군량을 저축하고 일이 있을 적에는 남녀노소가 성에 올라가 사수할 수 있는 요새입니다.” 정조 때 윤면동의 상소문에 의하면 “ 대저 우리나라의 산천은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오묘한 구역이어서 남을 공격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스스로 지키기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는 방도는 성벽을 공고히 하고 청야전술에 의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관방을 엄중히 하여 왜구가 오는 길을 끊고, 산성을 축조하여 입보할 장소를 만들고 민병과 약속을 정하여 보오를 만들고, 관창의 것을 옮기고 사저를 실어 나름으로써 청야술책을 행한다면, 두어 달이 지나지 않아 10만의 왜구를 금방 굶어 죽게 할 수가 있습니다.”라 하여 유사시에 대비한 성을 마련하여 청야전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동지지에도 도성과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경기도에 6 산성, 충청도에 2 산성, 경상도에 6 산성, 전라도에 6 산성 등이 있었고, 황해도에 6 산성, 평안도에 9 산성 등을 마련하여 유사시에 인근 고을의 주민이 입보하는 산성이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