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주요 시설은 크게 성곽, 성문, 성내시설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성곽은 남한산성의 가장 핵심적인 방어 시설로, 여러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성곽의 주요 구성 요소로는 원성, 외성, 장대, 군포, 옹성, 포루와 기타 시설들이 포함되어 있다. 본 글에서는 성곽의 여러 구성 요소 중 특히 원성과 외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원성
삼국사기에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처음 쌓았다고 하였는데, 성 둘레는 4,360보라 하였다. 이러한 길이는 현재의 남한산성에서 외성인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을 제외한 중심지역의 성곽 길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원성은 조사결과 9㎞내외여서 기록상과 비슷하여 조선시대의 남한산성은 신라 때 축조한 주장성을 활용하여 개축한 성곽으로 보인다. 이는 인조 2년(1624) 7월에 축조할 당시, 총융사 이서에게 명하기를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개축하도록” 한 것으로 보아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겠다. 인조 2년(1624)에 원성을 축조할 당시 동남측과 서북 측을 구획하여 축조하도록 하였다. 동남쪽은 총융사 이서의 부하장수인 이회가 축성의 책임을 맡았고, 서북쪽은 도총섭이었던 벽암대사의 책임 하에 승병들에 의해 축조되었다.
외성
인조 때에 남한산성을 수축한 다음 병자호란이라는 쓰라린 전란을 겪게 되었다. 이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록 남한산성은 산성축조의 가장 이상적인 지형인 고로봉에 축조되었으나, 실제 전투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방어 상의 취약한 곳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전후 여러 차례에 걸쳐 기존의 성곽에 보강을 필요로 하는 여러 시설을 하였다. 대표적인 보완 시설로 본성의 동측 지역의 높은 고지가 위협적이었던 봉암과 한봉 지역에 외성을 마련하여 성내로 끌어들였고, 남측성벽의 맞은편에 마주하는 고지인 검단산은 남한산성을 내려다보는 지형이었다. 전후 이 지형을 적이 활용하는 것을 막고자 돈대 형식의 방어시설인 신남성을 대봉인 검단산에 마련하였다. 그리고 검단산과 마주하는 남측성벽에는 3개소나 되는 포대를 마련하여 적의 화포공격에 대응하는 포대 시설을 마련하여 두었다. 이러한 외성 외에도 성벽 가까이에 적의 활동이 예상되는 주요 지점에는 별도로 성벽에 붙여 좁다란 통로를 낸 형식인 옹성 시설을 마련하였다. 이 옹성은 적의 주요 접근로 상에 외부로 뻗은 능선에 시설을 마련하여 적의 접근을 조기에 관측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한 포대 시설의 일종이다.
봉암성
봉암성은 원성의 동장대부근에서 동북쪽의 능선을 따라 봉암을 포함하는 성곽을 말한다. 이러한 벌봉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청량산보다 높아 병자호란 시에 청군이 점령하여 많은 고초를 겪은 곳이어서 이를 보강하기 위해 숙종 22년(1686) 부윤 윤지선이 둘레가 962보, 7리가 되고, 여장이 294타 암문이 4개소, 군포가 15개소였다. 숙종 31년(1705)에 수어사 민진후가 5개의 포루를 증축하고, 정조 3년(1779)에 수축하였다. 봉암성은 본성에 대하여 새로 쌓은 성곽이어서 외성, 신성,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한봉성
한봉성은 동문 밖으로, 봉암에서 남쪽으로 약 1.2㎞, 원성 동문에서 동쪽으로 0.8㎞지점에 위치한 한봉을 연결하는 성곽을 말한다. 한봉의 위치는 외부에서 남한산성으로 접근하기 가장 용이한 지점이 동측계곡부의 북쪽에 위치한 봉우리로 이 지점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남한산성의 출입이 제한받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인조때 축성구간에서 빠졌던 곳을 숙종 19년(1693) 수어사 오시복이 망월봉에서 한봉까지 각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851보 6리이고, 여장이 227개소 , 암문이 1개소이다. 이후 숙종 31년(1705)에 청인이 한봉성을 헐어버리자, 다시 영조 15년(1739) 수어사 조현명이 개축하였는데, 둘레가 895보, 여장이 272개소이고, 정조 3년(1779)에 수축하였다.
신남성
일명 남격대라고 하는데, 부의 남쪽 5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남한산성의 남쪽성벽에서 1.5㎞정도 떨어진 검단산 지역으로 남한산성과 마주 본다 하여 대봉이라고도 한다. 이 검단산은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보다도 지형적으로 높은 곳이어서 병자호란당시 청군이 이곳을 점령하여 포를 설치하여 포격을 많이 가하였던 곳이었다. 이러한 맞은편의 중요한 고지가 남한산성의 방어에 중요한 장애요소여서, 적의 활용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독립된 성곽의 형태인 돈대를 마련하였다. 돈대란 본성과는 떨어진 곳으로 지형여건상 연결하기는 어려운 곳에 마련한 방어시설을 말한다. 이 신남성은 숙종 45년(1719) 수어사 민진후가 개축하였는데, 성 둘레가 743보, 여장이 238개소였고, 이후에도 영조 18년(1753)에 두 돈대를 쌓았다고 한다. 현재 신남성은 2개의 돈대로 구분되어 있는데, 동돈대는 둘레가 134m내외인데 현재 송신탑이 성내에 있고, 서돈대는 동돈대에서 서쪽으로 23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의 주요시설 중 성곽의 구성요소에 해당하는 원성과 외성에 대해서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