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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보강, 시설완비, 관리

by bibianinto 2024. 10. 9.

지난 포스트에서는 남한산성의 독창성과 규모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내용에 이어서 남한산성 보강, 시설완비와 관리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남한산성 보강
남한산성 보강

 

남한산성 보강

 

 우리나라 일반적인 성곽형식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따라 성내에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단곽(單郭)으로 된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단곽의 성곽은 장단점이 있는 바, 장점은 축성 시 공력과 기간을 줄이고, 넓은 성내면적을 갖게 하는 동시에 유사시 효과적인 병력배치가 가능하다. 반면, 단점은 성벽의 어느 한 곳이 뚫리게 되면 성 전체가 함락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라는 전쟁경험을 통하여 전후에 전시에 느꼈던 취약점을 과감하게 보강하였다. 보완된 대표적인 시설로 원성의 동측에 봉암과 한봉을 감싸 안는 외성, 그리고 남측 성곽의 맞은편의 봉우리인 검단산에 마련한 돈대형식의 신남성이 있다. 그 외에 옹성이라고 불리는 시설로 서북 측의 연주봉옹성과 동측의 신지옹성 등의 시설을 마련하여 적의 접근을 사전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 외 원성의 성벽은 기존의 성벽보다 1m 정도 더 높게 축조하여 성벽의 높이를 보강하여 축조하는데, 이러한 증축된 성벽은 성벽상단을 따라 기존의 축성형식과 달리 장방형의 적은 성돌로 축조된 형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시설 완비

 

 남한산성에는 성벽과 성문 외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성 내외에 각종 시설을 완비하였다. 성벽선상에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험준한 능선으로 된 지형을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고, 실제로 병자호란의 격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던 문제점을 잊지 않고 전후에 이를 보완하였다. 대표적인 보완시설은 외성과 옹성, 돈대 등의 시설을 마련하였고, 성내에는 전고, 사방에 성문을 마련한 것 외에 16개소나 되는 암문을 마련하여 유사시에 병력과 물자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성내에는 유사시에 조정의 이전에 대비한 행궁과 나라를 상징하는 시설인 종묘와 사직에 해당되는 좌전과 우실을 갖추고 있다. 또한 각 방향에 1개소씩 그리고 외성에 1개소 등 5개소의 장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축성이나 성곽관리를 위해 군부대의 주둔과 조선시대 축성에 널리 활용되었던 승병이 기거하였던 사찰이 9개소나 있었다. 그 외에도 남한지에 의하면 산성 내에는 10여 개의 사당이 있었는데, 현존하는 대표적인 사당으로 삼학사를 모신 현절사, 백제 온조왕과 산성축조책임자 이서를 모신 사당인 숭열당, 이회와 그의 부인영혼을 위한 사당인 청량당 등이 있다. 남한산성은 성곽으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벽, 성문을 비롯한 성내 외의 각종시설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갖추었으며, 특히 전란을 통하여 보완을 거듭하여 실전에 필요한 시설이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음은 다른 산성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닌 최고시설의 성곽이라 할 수 있다. 

 

관리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남한산성의 성곽은 명칭만 다를 뿐, 인조 때 마련한 현재의 남한산성과 규모와 형식면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남한산성의 성곽관리를 살펴보면, 조선초기부터 남한산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보이고, 세조 때에는 남한산성에 진을 두었고 , 이후 남한산성의 수어를 위해 처음에는 총융청이 수어를 맡았다가, 인조) 4년(1624)에 성이 완성되면서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따로 마련하였다. 수어청에는 전, 좌, 중, 우, 후의 5관을 두어 조선조 말에 이르기까지 운영되었다. 또한 인조 6년(1628)에는 남한산성방어사의 임무를 광주목사로 하여금 겸임케 하여, 읍치를 산성 내로 옮겨 관리하였다. 실질적인 성곽관리를 위해 광주전 20 결을 산성에 붙임으로 산성방어의 태세가 갖추어졌다. 남한산성 내에는 성역과 승군확보를 위해 성내에 9개소의 사찰을 마련하였다. 이로써 평시와 유사시의 승병이 확보되고 성곽의 유지관리에 큰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의 보강, 시설완비, 관리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