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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독창성, 규모

by bibianinto 2024. 10. 8.

남한산성은 다른 나라의 성들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이 성곽의 독창성과 규모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남한산성의 독창성

 

남한산성의 성곽형식은 우리 민족이 오랜 기간 산지의 지형을 잘 이용하고, 전통의 전술인 청야입보의 전술개념을 잘 활용하는 성곽형식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잘 찾아볼 수 없는 전통의 축성형식이라 할 수 있다.  남한산성은 대규모의 천연요새지에 마련된 산성으로, 유럽, 일본의 성곽형식인 CASTLE개념의 성(城)과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은 WALL개념의 장벽과는 구조와 형식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형식이고,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이 장벽또는 장새개념과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과 같은 형식의 산성은 우리만이 지니는 자연의 지세를 잘 활용한 난공불락의 성곽형식이다.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미리 축성하여 유사시에 입보하여 농성하고자 한 시설이다. 이러한 성곽의 성격은 FORTRESS 즉 대규모요새의 성격을 지닌 성곽개념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남한산성의 지형은 서쪽 끝은 청량산, 동쪽 끝은 봉암으로 하는 동서가 긴 자연 지세를 잘 활용한 성곽형태로, 성곽의 주변의 높은 산지와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한산성은 계곡지역인 동문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곽이 해발 400~500m내외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곽이다. 성벽이 축조된 지점은 능선을 따라 축조되면서 성벽은 능선의 외사면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외부는 대개 급경사지 지형으로 비록 성벽이 없다고 하더라고 해발 300~500m에 해당되는 험준한 고지이며 산지여서, 성벽을 별도로 축조하지 않아도 방어에 유리한 축성효과가 나타나는 지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우리 성곽은 일부 다른 국가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성곽형식과 달리 권력자와 주변인물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로 축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산성은 유사시에 산성 주변의 모든 백성이 다 함께 입보하여 함께 목숨을 걸고 농성하기 위한 시설로 성내에는 유사시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갖추었다. 남한산성은 수많은 산성 중에서도 도성의 지근거리에 위치하고,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축조되어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여기는 산성이어서,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사시에 조정의 이전까지 고려한 행궁을 비롯한 각종 시설을 성내에 마련해 두었다. 우리가 치른 많은 전란 중에 가장 고초를 겪었던 전쟁이라면 고려 때 7차례의 몽골 침략과 조선시대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의 1, 2차의 몽골의 침공을 주민들과 합심하여 격퇴시켰고, 조선시대에는 병자호란을 이곳에서 치렀는데, 결과적으로 전쟁은 패하였으나, 남한산성의 전투에서는 결코 함락되지 않았던 성곽이었다.

 

규모

 

  우리나라의 산성축조형식은 축성의 시기별로 다소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삼국을 비롯한 고대의 산성은 대개 산봉우리를 둘리는 퇴뫼식이라 불리는 산정식산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후대에 내려오면서 차츰 성 안쪽에 계곡을 포함하는 형식인 포곡식산성이 축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산성의 대부분은 둘레가 불과 200~500m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고, 후대에 대규모의 산성일지라도 둘레가 1,000~2,000m 내외가 큰 규모에 해당되는 산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둘레가 10㎞에 가깝고, 사방이 높고 성내에 넓은 계곡이 있어 음수가 풍부하고, 넓은 면적을 활용할 수 있는 산성이어서 일반적인 산지의 산성과는 그 규모와 활용도가 다른 독창성을 지닌 산성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남한산성은 이미 신라 문무왕 13년(673)의 처음 축조되었는데, 이 당시에 축조된 성 둘레가 4,360보로, 이를 환산해 본다면, 8㎞내외여서, 이는 당시로서 최대규모의 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