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수도였던 개성과 강화도의 도성 체계를 설명하겠다. 태조 시기 개성의 궁성(만월대)과 황성 축조를 시작으로,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축조된 나성의 건설 과정, 그리고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강화도 천도 이후 구축된 삼중 성곽(외성, 중성, 내성) 체계까지의 변천 과정을 다룬다. 고려 개성의 도성, 나성 축조, 강화도 천도와 성곽에 대해 차례대로 알아보겠다.
고려 개성의 도성
고려 태조 2년에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왕궁을 세우면서 황성을 쌓았다. 규모는 모두 2600칸, 문이 20개소의 소규모로 아직 도성으로서의 외형을 갖추지 못하였다. 궁성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황성이다. 황성은 동서 1,125m 남북 1,150m에 둘레 4,700m의 대략 사각형의 형태로 넓이는 125만 제곱미터이다. 그러나 황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의심하지 않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고려사에서 둘레와 20개의 성문 이름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궁성인 만월대는 동서 375m, 남북 725m, 둘레 2,170m의 마름모에 가까운 형태로 넓이는 25만 제곱미터이다. 개성은 정도와 관련하여 이를 보호, 방위해 줄 나성을 마련함이 필요하였는데, 고려초기에 나성에 관한 축성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기 전 궁예의 부하로 있었을 때, 왕건으로 하여금 발어참성을 쌓게 한 바 있었는데, 이 발어참성은 이전에 쌓은 송악성에 이어서 송악산의 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남쪽의 만월대지 일대를 돌아 다시 송악산의 북성문까지 연결시킨 성곽으로 그 길이가 8.2km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 발어참성은 비록 만족할 만한 성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미 성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대내외적인 정세가 후백제와 쟁패하는 한편, 북방의 거란, 여진에도 대비해야 했으므로, 새로운 축성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고려는 초기에 궁성과 황성 밖에 없었지만 다소의 시기가 지나고 나서부터 북방의 거란족의 대대적인 침입이 있는 등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나성 축조
거란의 1차 침입은 성종 12년에 감행되었는데, 이번에는 서희의 활약으로 큰 피해 없이 거란족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전운은 아직 가시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종 즉위년 3월에 외성인 나성을 축조하는 문제에 대해 조정에서 의논으로 축성하기에 이른다. 나성 축조를 실행에 옮기도록 한 장본인이 강감찬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나성은 현종 원년 장정 304,400명을 징발하여 시작하여 21년이나 걸려 준공되었다. 축성 시작 초기의 10여 년은 거란의 침공 등의 사유로 축성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는데, 나성은 토성으로 축조되었다. 나성 규모는 둘레가 29,700보, 높이 27척, 두께 12척이며, 주요 시설물로 나각이 13,000칸, 대문이 4개소, 중문이 8개소, 소문이 13개소였다.
강화도 천도와 성곽
13세기 초, 몽고가 고려를 침공하여 국토 전역이 몽고군에 유린당하게 되자, 고종 19년에 몽고와의 결사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강화도가 개경에 가까우면서 수전에 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하고자 함에 있었다. 고려는 강화로 천도하여 고종 21년부터 내성에 해당되는 왕궁과 관아 시설은 마련하였다. 신궁을 지으면서도 개경을 잊지 못해 왕궁의 이름을 연경궁이라 하였고,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송악의 모습을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축조한 강화의 성곽은 토축으로 외성, 중성, 내성으로 구분하여 마련하였다. 외성은 고종 20년에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축조하였는데,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길이 37,076척에 달하는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이루어졌다. 고종 34년에는 둘레 3,877척의 내성을 축조하였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축조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고종 37년에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원종 11년 몽고와 화의하고, 개경으로 환도함으로써 39년간의 강도시대가 끝나게 되었다. 몽고와 강화조건으로 강도에 마련되었던 성들은 모두 헐게 되었다. 현재의 내성은 조선 전기에 가오하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고,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된 내성은 숙종 3년에 성을 보수하면서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넓혀 축조한 성곽이 현재의 강화산성이다. 강화의 외성은 고종 20년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은 것으로, 외성은 몽고군을 막아내는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고려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중성은 북산의 북장대에서 남산의 남장대까지 현재의 강화산성과 중첩된다. 다시 북쪽으로 북장대에서 옥림리의 옥창돈대까지 그리고 남쪽으로는 남장대에서 신정리의 신대마을의 뒷산까지 연결되는 것으로 전체길이 약 9km에 달한다. 내성은 고종 34년에는 둘레 3,877척의 성을 축조하였다. 이를 환산하면 1km 내외인 점으로 보아 왕궁인 연경궁과 관아 건물들이 들어선 지역을 둘러싼 궁장을 두고 내성이라고 지칭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까지 고려 개성의 도성, 나성 축조, 강화도 천도와 성곽에 대해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