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고대 한국의 각 왕조에서 나타나는 궁성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고, 그중 고구려의 궁성 발전 과정을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궁성 개요
궁성 또는 왕성은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거주하는 공간을 성벽이나 궁장으로 두른 시설을 말한다. 대표적인 궁성으로 고구려의 국내성, 안학궁성 등이 있고, 백제는 궁성 또는 왕성이 정확히 규명된 바는 없으나 한성시대의 풍납토성, 웅진시대의 공산성과 사비시대의 부소산성 일대가 궁성 또는 왕성이었다고 보고 있다. 신라는 월성이 대표적인 궁성이었으며, 고려는 개성 내에 황성이 궁성을 감싸 안은 형태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궁성은 현재 만월대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는 경복궁을 비롯하여 여러 궁궐이 궁성으로 활용되었다. 궁성 내에는 봉건사회에서 최고 권력자인 왕이 거처하며 통치하는 곳으로, 궁궐을 짓고 이에 필요한 각종 부속건물을 갖추었다. 이러한 건물들을 외곽으로 성벽이나 담장형식의 궁장으로 둘러싸는 형식인데, 이를 통틀어 궁성이라 하였다. 고조선의 궁성으로 여겨지는 성곽은 왕검성이 있으나, 이 왕검성의 위치와 성격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고구려의 궁성
고구려의 초기에는 궁성과 나곽을 두른 도성 개념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가, 마지막 도성이었던 장안성으로 천도하면서 내 외성을 갖춘 형식으로 발전외었다. 최초 도읍지인 흘승골성은 현재의 환인지역의 오녀산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궁성 겸 도성으로, 궁성과 나성이 구분되지 않는 성곽형식이라 하겠다. 2차 도읍지인 국내성은 현재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해 있는데, 인접한 서북측 지역의 산지에 위나암산성이 마련되었다. 국내성은 궁성이고, 인접한 산성인 대피성의 산성을 마련하는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국내성은 평지성으로 전체 둘레는 2,686m로 성벽은 장방형 또는 방형으로 가공한 성돌로 축조하였고, 성벽내부에는 흙과 자갈을 채운 형식이었다. 성벽의 하단은 폭이 7~13m이고, 현재의 잔존성벽 높이는 2~4m 내외로 남아았따. 남북으로 각 1곳씩, 동서에는 2곳씩 전체 6개소의 성문이 마련되었는데, 성문에는 옹성시설이 마련되었고, 성벽에는 16개소나 되는 치가 마련되어 있다. 3차 도읍지인 안학궁성도 국내성과 같이 궁성과 그 배후의 대성산성을 마련하는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안학궁성 장수왕 15년에 국내성에서 평양의 안학궁으로 천도하였다. 안학궁은 대성산의 소문봉 바로 남쪽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성둘레가 2,488m에 이르는 방형성이고 한 변의 길이가 약 620m내외이다. 궁성의 성벽은 밑부분에 3~7단의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높이 12m 정도 되는 토성 벽을 쌓아올렸다. 성문은 남쪽에 3개, 나머지 방향은 1개씩 전체 6곳의 성문을 마련하였다. 성벽 바깥에는 해자시설이 마련된 궁성이라 하겠다.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인 장안성은 현재의 평양성을 말한다. 이 장안성은 이전의 도성형식과 달리 도성과 궁성이 함께 갖춰진 발전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평양성인 장안성은 궁성과 나성이 함께 마련된 성곽으로 내성이 궁성에 해당되는데, 궁성인 내성은 남쪽성벽에 주작문 안상문, 함광문 등 3개의 성문이 마련되어 있고, 동벽과 서벽에는 각각 1개씩 성문이 있으며, 북벽에는 성문이 없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인 용강대묘와 삼실총의 벽화에서도 궁성으로 보이는 성곽의 사실적인 그림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지금까지 한국 고대왕국의 궁성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하고, 고구려 궁성의 발전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