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가야, 발해, 후백제, 후고구려의 도성

by bibianinto 2024. 11. 13.

이 글에서는 한국 고대 왕국들의 도읍지와 성곽에 대해 설명하겠다. 가야연맹, 발해, 후백제, 후고구려의 도성 위치와 규모, 구조 등을 살펴보고, 가야연맹의 중심세력인 금관가야, 발해의 4차례 도읍 이전, 후백제 도성 전주지역, 후고구려 풍천원도성 등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고대 왕국들의 도성 및 성곽 구조의 특징을 알아보겠다.

 

가야

 

낙동강 하류의 변한 12개국에서는 기원전후 철기문화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연맹왕국이 출현했다. 김해의 금관가야(본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함창의 고령가야, 고령의 대가야, 성주의 성산가야가 그것인데, 이 중에서 가야연맹의 중심세력은 금관가야로 시조는 수로왕이다. 가야연맹은 대체로 5세기 후반을 경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가야는 김해부근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가야는 5~6세기경 고령부근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최근의 발굴성과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도성은 김해 봉황대 지역으로, 즉 봉황대를 중심으로 외부를 둘러싼 토루가 경성의 나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발해

 

발해는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된 후 926년 멸망할 때까지 229년간 도읍지를 네 번이나 옮겼다. 첫 번째는 구국 오동성으로,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의 돈화분지로 보인다. 궁성은 동서로 긴 장방형으로 외성과 내성의 2 중성으로 조영된 토성으로 조성되었다. 이어 오동선으로 비정되는 구국에서 현재 길림성 화룡현 두도평원 서북부에 위치하는 서고향 북고성촌이다. 서고성도 토성으로 된 내 외성을 갖춘 형식의 성곽으로, 외성은 장방형으로 둘레가 2,714m이다. 두 번째는 755년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옮겼는데, 상경성은 산지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지로 목단강이 감싸 돌고 있다. 상경성은 외성과 내성이 구분되며, 내성은 다시 황성과 궁성으로 나뉜다. 황성은 중앙 정부기관인 3성 6부가 위치하였던 곳이고, 궁성은 궁전 공간이다. 자료에 의하면, 외성에는 10개의 성문터가 있는데, 동서 두 벽에는 각각 2개, 남북 두 벽에는 각각 3개씩의 성문이 있었다. 외성의 총길이는 16,296m이고, 궁성은 3,986m이었다. 세 번째는 785년 상경용천부에서 현 길림성 혼춘시 팔련성의 동경용천부로 옮겼고, 네 번째는 794년 동경용원부에서 다시 상경용천부로 옮겼다. 상경용천부는 발해 존속기간인 229년 중 150여 년간을 이용한 대표적인 도성이다.

 

후백제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견훤은 892년에 스스로 왕이라 하고 900년에 완산에 도읍하였다. 후백제가 936년 멸망할 때까지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완산이 현재의 전주 지역과 동일한 지역임은 삼국사기 지리지와 고려사 지리 전주목의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후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곳은 전주 남쪽지역으로 보이나 도시화로 인하여 그 흔척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가장 유력한 도읍지로 추정되는 전주의 동고산성을 비롯한 여러 곳들이 후백제의 도성지였을 것으로 보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다. 

 

후고구려의 도성

 

궁예는 군사를 일으켜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했다. 이듬해 청주사람 1,000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였다. 905년 송악에서 철원의 풍천원으로 천도하였다. 이 풍천원도성은 919년 왕건이 다시 송악으로 천도할 때까지 14년간 도성으로 역할을 하였다. 현재 도성지의 위치는 군사분계선 내의 철원북쪽 홍원리~어문면 중강리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군사분계선 내로, 실질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도성의 실태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간 조사된 기록이나 자료를 통하여 이 도성은 2 중성으로 된 장방형의 도성구조로 외성의 둘레는 14,421척이고, 내성은 1905척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가야, 발해, 후백제, 후고구려의 도성에 대해 알아보았다.